칸나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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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칸나이 전투는 기원전 21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대승이다. 한니발은 보병과 기병의 유기적인 운용을 통해 로마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했다. 이 전투는 포위 섬멸전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평가받으며, 로마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다.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는 지구전으로 전략을 바꾸고 기병 육성에 힘썼으며, 결국 자마 전투에서 승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칸나이 전투의 전술은 현대 군사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슐리펜 계획과 걸프 전쟁의 다국적군 작전 등에서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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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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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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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명 | 칸나이 전투 |
관련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
날짜 | 기원전 216년 8월 2일 |
장소 | 칸나이, 이탈리아 |
결과 | 카르타고의 승리 (결과에 대한 이견 있음) |
영향 | 카르타고군, 남부 이탈리아에 거점 확보; 카푸아를 포함한 일부 로마 동맹국의 카르타고로의 이탈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공화정 |
교전국 2 | 카르타고 |
지휘관 | |
로마 공화정 지휘관 | 가이우스・테렌티우스・바로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카르타고 지휘관 | 한니발・바르카 마고・바르카 기스코 한노 하스드루발 마하르발 |
병력 규모 | |
로마 공화정 병력 | 총합: 86,400명 경보병: 15,000명 벨리테스 보병: 55,000명 로마인: 25,000명 동맹군: 30,000명 기병: 6,400명 로마 기병: 2,400명 동맹 기병: 4,000명 동맹군 수비대: 10,000명 (로마 진영 2곳에 배치) |
카르타고 병력 | 총합: 50,000명 경보병: 8,000명 산병: 6,000명 발레아레스 투석병: 2,000명 보병: 32,000명 골족: 21,000명 히스파니아인: 3,000명 리비아인: 8,000명 기병: 10,000명 누미디아 기병: 4,000명 히스파니아 기병: 2,000명 골족 기병: 4,000명 |
피해 규모 | |
로마 공화정 피해 | 총합: 67,500–80,000명 리비우스 전사: 48,200명 포로: 19,300명 탈출: 14,000명 이상 폴리비오스 전사: 70,000명 포로: 10,000명 탈출: 3,000명 |
카르타고 피해 | 총합: 5,700–8,000명 리비우스: 전사 8,000명 폴리비오스: 전사 5,700명 |
2. 지휘관
카르타고 측 지휘관은 한니발이었고, 로마 공화정 측 지휘관은 타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였다.[5]
기원전 216년 봄, 한니발은 아풀리아 평원에 있는 칸나이의 대규모 보급 기지를 점령하여 로마군과 그들의 중요한 보급원 사이에 위치했다. 폴리비우스는 칸나이 점령이 "로마군에 큰 동요를 일으켰는데, 이는 그 장소와 그 안의 보급품의 손실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을 장악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했다.[5] 로마 집정관들은 한니발과 대결하기로 결심하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이틀 후 아우피두스 강 왼쪽 기슭에서 한니발을 발견하고 8km 떨어진 곳에 야영했다.[7]
첫날 지휘를 맡은 바로는 한니발을 격파하려는 무모한 성격과 오만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로마군이 칸나이에 접근하자 한니발의 경보병과 기병 일부가 매복 공격을 했지만, 바로는 이를 격퇴하고 칸나이로 향했다. 이 승리는 로마군의 자신감을 크게 높였다.[7]
파울루스는 전투에 반대했다. 그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으며, 로마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곳에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특히 한니발이 기병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초기 성공 이후 군대를 철수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군대의 3분의 2를 아우피두스 강 동쪽에 야영시키고, 나머지를 강 반대편에 2km 떨어진 곳에 요새화하기 위해 보냈다. 이 두 번째 캠프는 메인 캠프에서 식량을 구하는 부대를 돕고 적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10]
두 군대는 이틀 동안 각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둘째 날 한니발은 전투를 제안했지만 파울루스는 거절했다. 한니발은 아우피두스 강이 로마 군인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의 기병을 작은 로마 캠프로 보내 물을 운반하는 병사들을 괴롭혔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의 기병은 로마 진영에 혼란을 일으키고 물 공급을 방해했다.[11]
전투가 벌어지는 아침, 기스고라는 카르타고 장교가 한니발에게 로마 군대의 규모가 놀랍다고 말했다. 한니발은 "기스고, 더 놀라운 것이 하나 더 있다"며 "우리 앞에 있는 저 많은 사람들 중에 기스고라는 이름의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답하여 카르타고 군단에 웃음을 터뜨렸다.[12]
아피아누스와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500~600명의 용병을 로마 측에 귀순하는 척하게 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옷 속에 칼을 숨겨두었다가, 전투가 시작되자 로마군을 공격하여 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나 이 부분의 진실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2. 1. 카르타고군 지휘관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명장으로, 칸나이 전투에서 탁월한 전술과 전략을 보여주었다. 그는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로마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역사적인 대승을 이끌었다.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은 기병대를 지휘하며 로마군 기병대를 격파하고 포위망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 다른 동생인 마고는 카르타고 보병을 이끌며 로마군 보병을 압박했다.2. 2. 로마군 지휘관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지휘관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였다.[7] 로마는 통상적으로 두 명의 집정관이 각자 군대를 지휘했지만, 칸나이 전투에서는 두 군대가 통합되었기 때문에 로마법에 따라 매일 번갈아 가며 지휘했다.[7]전투 당일 지휘를 맡은 바로는 무모하고 오만한 인물로 묘사된다.[7] 그는 한니발의 계략에 빠져 로마군이 대패하는 데 큰 책임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낮은 출신 배경 때문에 귀족 세력에게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7]
반면 파울루스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인물로, 로마군이 수적으로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평야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한니발의 기병대가 로마군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우려했지만, 바로의 주장에 밀려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파울루스는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7]
요약에 따르면, 전직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로마군 중앙 보병을 지휘하다 전사했다.
3. 배경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에 침입하여 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했으나,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전투를 피하며 지구전을 펼쳤다. 그러나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전역이 약탈당하게 되자, 로마 시민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한니발과의 결전을 요구했다.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임기가 끝나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타렌티우스 바로를 집정관에 임명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도록 했다.
두 집정관은 약 8만의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과 싸우기 위해 나섰다. 파울루스는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을 피하자고 주장했으나, 바로는 결전을 원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13] 남이탈리아 아풀리아 지방의 칸나이 부근에서 당일 최고지휘관이 된 바로에 의해 칸나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고대 역사가들은 전투 날짜를 정확하게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리비우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에 대해 명시적인 날짜를 제공하지 않았다. 마크로비우스는 로마 연대기 작가 퀸투스 클라우디우스 쿼드리게리우스를 인용하여 이 전투가 8월 2일에 벌어졌다고 언급했다.[13] 그러나 율리우스력 이전의 로마력은 율리우스일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리비우스는 기원전 168년에 일어난 월식을 9월 4일로 기록했지만, 천문학적 계산에 따르면 그해 6월 21일에 발생했다.[14] 이러한 불일치는 교황청이 윤달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P.S. 데로우는 증거를 검토한 결과 칸나이 전투에 상응하는 율리우스력을 기원전 216년 7월 1일로 특정했다.[15]
3. 1.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기원전 218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2] 로마 원로원은 급히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전력을 재편성할 시간을 벌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결전을 교묘하게 피하고 지구전을 펼쳐 카르타고군의 소모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전역이 약탈당하자, 파비우스의 이러한 자세는 겁쟁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결전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3] 이에 따라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두 명을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적극적인 전략으로 전환했다.
두 집정관은 총 8만 명 이상의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을 맞이하러 갔다. 파울루스는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바로는 결전을 원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남부 이탈리아의 아풀리아 지방 칸나이 부근에서, 로마군과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 약 5만 명이 대치했고, 당일 최고 지휘관인 바로가 결전을 벌이면서 칸나이 전투가 발발했다.
3. 2. 로마의 초기 대응: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
기원전 218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로마 원로원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전력을 재편성할 시간을 벌었다.[13]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결전을 피하고 지구전을 펼쳐 카르타고군의 소모를 노렸다.그러나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전역이 약탈당하자, 파비우스의 전략은 겁쟁이 같다는 비판을 받았고, 결전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3]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임기가 끝나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적극적인 전략으로 전환했다.
3. 3. 바로와 파울루스의 집정관 선출과 강경 대응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에 침입하여 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2] 로마 원로원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했으나,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전투를 피하며 지구전을 펼쳤다.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 전역을 약탈하자, 로마 시민들은 파비우스를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한니발과의 결전을 요구했다.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임기가 끝나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집정관으로 선출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것을 요청했다.[3][4]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8개의 로마 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각 군단은 동맹군을 제외하고 5천 명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군대의 일반적인 배치는 보병을 중앙에, 기병을 양쪽 날개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로마군은 이 관례를 따랐지만, 한니발의 중앙을 빠르게 돌파하기 위해 보병의 폭보다 깊이를 더 선택했다. 바로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 보병이 한니발의 중앙을 돌파했던 것을 알고, 이를 더 큰 규모로 재현하려 했다. 프린키페스는 하스타티 바로 뒤에 배치되어 로마군이 통일된 전선을 유지하도록 했다.[5][19]
두 집정관은 약 8만의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과 싸우기 위해 나섰다. 파울루스는 정면 대결을 피하자고 주장했으나, 바로는 결전을 원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 아풀리아 지방의 칸나이 부근에서 당일 최고지휘관이 된 바로에 의해 칸나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4. 전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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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양측 군대가 서로에게 접근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전열 중앙을 점차 확장하여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는 로마 보병의 전진을 늦추고, 한니발이 아프리카 보병을 효과적으로 배치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다.[5]
전투는 측면에서 치열한 기병전으로 시작되었다. 카르타고 기병은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로마 기병을 격파했다. 특히,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기병은 로마군 우익 기병을 격파한 후, 전장의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누미디아 기병과 싸우던 로마 동맹 기병을 공격하여 붕괴시켰다.[5]
카르타고 기병이 로마 기병을 격파하는 동안, 양측 보병 부대는 전장 중앙에서 격돌했다. 한니발은 약한 중앙에 배치된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부대에게 통제된 후퇴를 지시하여 로마군을 유인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했지만, 한니발의 의도대로 점차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로마군이 좁은 공간에 밀집되자, 카르타고 기병이 후방에서 공격해 왔다. 이와 동시에 한니발은 아프리카 보병에게 로마군의 측면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로마군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카르타고군은 체계적으로 로마군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리비는 "수많은 로마인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상처가 아침의 추위에 짓눌려 일어나려고 하던 일부는 피로 뒤덮여 죽은 자의 무덤 한가운데서 적에게 제압되었다. 일부는 머리를 파서 땅에 박혀 있었다. 그렇게 보였듯이 스스로 구덩이를 만들고 질식사했다"라고 묘사했다.[26] 결국 로마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포함한 소수의 병력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4. 1. 로마군의 배치
로마군은 1만 명을 야영지 경비에 남겨두고 나머지 7만 명을 전장에 배치했다. 주력인 중장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앞에 경장보병을 전개했으며, 우익은 로마 기병, 좌익은 동맹국 기병이 담당하는 방식이었다.[6][7][8][9] 로마군의 작전 의도는 중장보병에 의한 중앙 돌파에 있었으며, 이를 위해 각 대대(마니풀스)의 간격을 좁혀 전열 중앙을 두텁게 했다.[19] 중앙 지휘는 전 집정관(프로콘술)인 세르빌리우스가 담당했고, 파울루스는 우익 기병, 바로는 좌익 기병을 지휘했다.[20]당시 군대의 일반적인 배치는 보병을 중앙에, 기병을 양 날개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로마군은 이 관례를 비교적 충실히 따랐지만, 한니발의 대형 중앙을 빠르게 돌파하기 위해 보병의 폭보다는 깊이를 더 선택했다.[5] 바로는 로마 보병이 트레비아에서 한니발의 중앙을 어떻게 돌파했는지 알고, 이를 훨씬 더 큰 규모로 재현할 계획이었다.[21] ''프린키페스''는 ''하스타티'' 바로 뒤에 배치되어 최초 접촉 시 앞으로 밀고 나가 로마군이 통일된 전선을 유지하도록 했다.
4. 2. 카르타고군의 배치
한니발은 약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임했다. 중앙에는 갈리아 보병과 히스파니아 보병을 배치하여 로마군의 공격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양옆에는 숙련된 카르타고 보병을 배치하여 로마군을 압박하도록 했다. 보병 전열의 우익에는 누미디아 기병을, 좌익에는 히스파니아 및 갈리아 기병을 배치하여 로마군보다 우세한 기병 전력을 확보했다.[22]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은 한노에게, 히스파니아 및 갈리아 기병은 하스드루발에게 지휘를 맡겼다. 우익의 카르타고 보병은 마고가 지휘했고, 한니발 자신은 좌익의 카르타고 보병을 이끌었다.[22]
이러한 배치는 중앙에서 로마군의 주력을 붙잡아두고, 양익의 우세한 기병 전력으로 로마군을 포위하려는 한니발의 전략을 반영한 것이었다.[22]
카르타고 군대는 다양한 지역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병종 | 출신 | 병력 규모 |
---|---|---|
리비아 보병 | 리비아 | 약 8,000명 |
게툴리 보병 | 게툴리 | 약 5,500명 |
골족 보병 | 보이, 인수브레스 등 | 약 16,000명 (전투 당일 8,000명은 캠프에 잔류) |
히스파니아 보병 | 이베리아인, 켈트이베리아인, 루시타니아인 등 | 약 8,000명 |
누미디아 기병 | 누미디아 | 약 4,000명 |
이베리아 반도 출신 기병 | 이베리아 반도 | 약 2,000명 |
골족 기병 | 골족 | 약 4,000명 |
리비아-페니키아 기병 | 리비아-페니키아 | 약 450명 |
산병 | 발레아레스 투석병 등 혼성 | 약 1,000~2,000명 (투석병), 약 6,000명 (창병) |
이들은 각 집단이 한니발과 맺고 있는 개인적인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있었다.[16]
4. 3. 전투 전개
전투는 양측 기병 간의 격돌로 시작되었다.[5] 카르타고군 좌익의 히스파니아-갈리아 기병은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군 우익 기병을 격파하고 패주 시켰다. 한편, 카르타고군 우익의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군 좌익의 동맹군 기병은 팽팽하게 맞섰다.
한니발은 중앙의 히스파니아-갈리아 보병에게 점차 후퇴하도록 지시하여 로마군을 유인했다. 이들은 활 모양으로 배치되어 로마군 중앙의 전진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중앙을 압박하는 동안, 양익의 카르타고 보병을 전진시켜 로마군 전열의 양 측면을 압박했다.
로마군 우익 기병을 격파한 하스드루발 지휘 하의 히스파니아-갈리아 기병은 로마군 후방으로 돌아가 누미디아 기병과 싸우던 로마군 좌익의 동맹군 기병을 협공했다. 전력상 열세였던 동맹군 기병은 곧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 기병은 도망치는 로마군을 추격하는 대신 로마군 보병의 후방으로 돌격했다.
로마군 중앙 보병은 카르타고군 중앙을 거의 돌파할 뻔했지만, 양 측면은 카르타고 보병에게 막혀 전진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 중앙은 V자 형태가 되었다. 이때, 카르타고 기병이 후방에서 공격해 오자 로마군은 혼란에 빠져 밀집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중앙의 병사들은 압사당하기도 했다.
결국 로마군은 전방의 히스파니아-갈리아 보병, 측면의 카르타고 보병, 후방의 카르타고 및 누미디아 기병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도망치지도 못하고 궤멸되었다.[25]
4. 4. 로마군의 궤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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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로마군의 중장 보병은 카르타고 보병 전열을 돌파하기 위해 전진했다. 히스파니아-갈리아 보병은 조금씩 밀리고 있었지만, 활 모양의 배치 덕분에 로마군 중앙의 전진 속도를 다소 늦출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카르타고군 좌익의 히스파니아-갈리아 기병이 우세한 전력으로 로마군 우익 기병을 압도하여 이를 궤주시켰다. 한편, 카르타고군 우익의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군 좌익의 동맹국 기병은 호각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자군의 전열 중앙이 압도당하고 있는 것을 본 한니발은 양익의 카르타고 보병을 전진시켜 로마군 전열의 양익을 밀어 넣었다. 한편, 로마군 우익 기병을 궤주시킨 하스드루발 지휘 하의 히스파니아-갈리아 기병은 크게 로마군 후방을 질주하여 자군의 누미디아 기병과 교전하고 있는 로마군 좌익의 동맹국 기병을 배후에서 협공했다. 전력상 열세가 된 동맹국 기병은 곧 궤주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 기병은 도주하는 동맹국 기병을 쫓지 않고, 이번에는 로마군 중앙의 후방으로 돌아갔다.
로마군 중앙 전열은 거의 카르타고군 중앙을 돌파하려 했지만, 전열의 양익에 있는 카르타고 보병은 여전히 우세했고, 그 방면의 로마군은 전진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로마군 중앙의 진형은 V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양익의 로마군 기병을 궤주시킨 카르타고군 기병이 후방에서 덮쳐왔다. 후방을 기습당한 로마군은 패닉 상태에 빠져 극도로 밀집했기 때문에, 중앙의 병사는 압사하는 자까지 나타났다. 전방을 갈리아 보병, 양 측면을 카르타고 보병, 후방을 카르타고 기병에게 완전 포위된 로마군은 도주하는 것도 중앙 돌파도 할 수 없이 전멸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약 5만에서 7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야영지에 남겨진 부대도 대부분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28] 그날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다른 지휘관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했다.[29] 또한, 중앙 지휘를 맡았던 세르빌리우스도 전사했으며, 장교로서 군을 지휘하던 8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이 전사했다.[29] 당시 원로원은 최대 3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4명 중 1명 이상이 죽은 셈이다.
카르타고군의 사망자는 폴리비오스가 5,700명이었다고 기록했으며,[28] 그 대부분은 전열 중앙의 갈리아 병사였다고 하지만,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8,000구의 시신을 매장했다고 기록했다.[35]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는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지구전을 펼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마르켈루스 두 집정관은 공격 대상을 시칠리아와 히스파니아 등 카르타고 주변 지역으로 변경하여 외부로부터 붕괴를 시도했다.[61] 이들은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위협하여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한니발에게 보급이 이루어지는 것을 차단했다. 또한 로마는 전력을 재편성하고 칸나이 전투 패배의 원인이었던 기병을 육성하여 훗날 자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61] 다만 기병 조달은 어려웠기 때문에 동맹국의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의 승리로 로마 동맹 도시들이 이탈할 것을 기대했으나, 동맹 도시들은 로마와의 결속을 유지하여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적지에서 보급에 어려움을 겪던 한니발은 로마 공격 대신 비옥하고 카르타고 본국과 연락이 쉬운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에키아)로 주 공격 방향을 전환했다.
5. 1. 로마의 피해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약 5만에서 7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야영지에 남겨진 부대도 대부분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36] 그날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다른 지휘관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했다.[41] 중앙 지휘를 맡았던 세르빌리우스도 전사했으며, 장교로서 군을 지휘하던 8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이 전사했다. 당시 원로원은 최대 3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4명 중 1명 이상이 죽은 셈이다.[41]로마는 단 세 번의 원정 기간(20개월) 동안 17세 이상 남성 시민 전체 인구의 5분의 1(15만 명)을 잃었다.[38] 로마는 죽은 사람과 친척이거나 아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 애도일을 선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인들은 절망에 빠져 인신 제사에 의존하여 로마 포룸에서 두 번 사람을 산 채로 묻고, 아드리아 해에 거대한 아기를 버렸다. (이는 로마인들이 마르스에게 헌신하는 패배한 적들의 공개 처형을 제외하고는 인신 제사의 마지막 사례 중 하나였을 것이다.)[37]
카르타고군의 사망자는 폴리비오스가 5,700명이었다고 기록했으며, 그 대부분은 전열 중앙의 갈리아 병사였다고 한다.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8,000구의 시신을 매장했다고 기록했다.
5. 2. 한니발의 전략적 목표와 한계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키고 로마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을 휘하에 넣기도 하였으나, 로마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는 실패했다.[38] 리비우스는 "칸나이의 패배가 그 이전의 패배보다 얼마나 더 심각한지는 로마 동맹국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운명의 날 전에는 그들의 충성이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제 로마의 힘에 절망하는 단순한 이유로 흔들리기 시작했다."라고 언급했다.[40] 전투 이후,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로마의 정치적 통제에 반란을 일으켰고, 마케도니아 왕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을 지지하여 로마에 맞선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시작했다. 한니발은 또한 시칠리아에 남아 있는 유일한 독립 왕인 시라쿠사의 히에로니무스와 동맹을 맺었다.그러나 로마는 쉽게 항복하지 않았고, 동맹 도시들의 이탈도 제한적이었다. 한니발은 적지에서 보급에 대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이탈리아반도에서 고립되어 장기전을 치러야 했다.[45] 칸나이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많은 동맹국들이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여전히 이베리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지에서 상당한 병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5. 3. 로마의 전략 변화와 최종 승리
로마는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였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마르켈루스를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공격 대상을 시칠리아, 히스파니아 등 카르타고 주변 지역으로 변경하여 외부로부터 붕괴를 시도했다.[61]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위협하여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한니발에 대한 보급을 차단했다. 또한, 전력을 재편성하고 칸나이 전투 패배의 원인이었던 기병을 육성하여 훗날 자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61] 기병 조달은 어려웠기 때문에 동맹국의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한편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의 승리로 로마 동맹 도시들이 이탈할 것을 기대했으나, 동맹 도시들은 로마와의 결속을 유지하여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니발은 적지에서 보급에 어려움을 겪자 로마 공격 대신 비옥하고 카르타고 본국과 연락이 쉬운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에키아)로 주 공격 방향을 전환했다.
한니발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전쟁 의지를 꺾지 못해 이후에도 이탈리아 반도를 돌아다니며 로마의 동맹국을 괴롭혔다. 로마 동맹국들을 카르타고 편으로 만들어 로마를 고립시키려 했고,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을 휘하에 넣기도 했으나, 결국 로마의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한니발은 16년간의 로마와의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아프리카 본국으로 돌아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 원정군과 자마에서 대결한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칸나이 전투를 통해 카르타고 육군의 전술을 배웠고, 카르타고 육군은 오랜 기간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닌 신병이 많았기 때문에,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항복한다.
6. 칸나이 전투의 전술적 의의
칸나이 전투에 대한 주요 기록은 세 가지가 있지만, 모두 동시대의 기록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기록은 전투 후 약 50년 후에 폴리비오스가 남긴 것이다. 리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아피아노스는 그보다 더 늦게 기록을 남겼다. 아피아노스의 기록은 리비우스나 폴리비오스의 기록과는 관련 없는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다.[52] 폴리비오스는 이 전투를 로마의 불운의 절정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 이후 로마의 회복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기록에 나오는 사상자 수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52]
리비우스는 원로원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로마 패배의 책임을 평민 출신인 바로에게 돌렸다. 이는 리비우스가 이상화한 로마 병사들에게서 책임을 덜어주는 것이다.[52] 학자들은 아피아노스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필립 세이빈은 그의 기록을 "가치 없는 혼합물"이라고 평가했다.[52]
플루타르코스는 전투에 대한 일관된 기록은 남기지 않았지만, 《비교 열전》의 "파비우스"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편에서 칸나이 전투에 대한 여러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역사가 마틴 사무엘스는 파울루스가 오른쪽에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그날 바로가 지휘관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전투 후 바로가 원로원으로부터 받은 따뜻한 환영은 다른 지휘관들에게 가해진 혹독한 비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사무엘스는 바로가 지휘를 맡았더라면 그토록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지 의문을 제기한다.[52] 반면 그레고리 데일리는 로마 군대에서 오른쪽이 항상 지휘관의 자리였다고 지적하며,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파울루스와 싸웠다고 주장한 점을 들어 그날 누가 지휘를 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52]
6. 1. 포위 섬멸 전술의 모범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의 주력 부대를 포위 섬멸하였는데, 이는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 예라 할 수 있어서 모든 사관학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전투이기도 하다. 로마의 집정관 바 চারপাশে는 우세한 병력을 살려 주력인 중장보병으로 적 주력을 분쇄하는 교과서적 진형을 펼쳤다. 반면,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경보병과 중장보병으로 정면에서 지연전을 펼치면서 적 주력을 끌어들이고, 동시에 우세한 기병대를 이용하여 로마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기병을 빠른 시간 안에 물리치는 전술을 구상하였다.[47]예상대로 로마군 기병의 2배를 넘는 강력한 좌익 기병이 로마군 우익 기병을 분쇄하고, 대등한 수효였던 우익 기병도 로마군 좌익 기병을 부수는 사이 정면의 용병대와 중장보병이 로마군 보병 주력을 효과적으로 잡아두게 되었다. 양익으로 펼쳐진 용병대를 패주의 신호로 읽고 예비인 트리아리까지 투입한 로마군에 대해, 단지 양쪽으로 기동했을 뿐인 경보병 부대와, 로마군 기병을 분쇄한 좌우익 기병대로 구성된 포위진을 형성한 카르타고군은 애초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위섬멸전을 통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47]
군사 역사가인 시어도어 에이로트 도지는 "고대 시대의 전투 중 칸나이 전투보다 더 뛰어난 전투는 드물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윌 듀란트는 "이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의 사례이며, 2,000년 동안 군사 전술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썼다.[48]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포위 기동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장 기동 중 하나로 여겨지며, 서구 세계에서 상세히 기록된 포위 공격의 첫 번째 성공적인 사례로 언급된다.[49]
6. 2. 군사학적 연구 가치
칸나이 전투는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꼽히며, 모든 사관학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전투이다.[49] 군사 역사가 시어도어 에이로트 도지는 고대 시대의 전투 중 칸나이 전투보다 더 뛰어난 전투는 드물다고 평가했다.[47] 윌 듀란트는 이 전투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의 사례이며, 2,000년 동안 군사 전술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썼다.[48]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모든 지휘관은 전멸전을 추구하며, 여건이 허락하는 한 현대전에서 칸나이의 고전적인 사례를 복제하려 한다고 언급했다.[50] 이처럼 칸나이 전투는 군사적 성공의 대명사가 되어 전 세계 군사 학교에서 연구되고 있다.
칸나이 전투는 로마 군사 조직과 전술적 조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 보병은 그리스 팔랑크스와 유사한 대형을 취했는데, 이는 로마군이 독립적으로 기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니발의 이중 포위 전술에 취약하게 만들었다.[46] 이러한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군은 팔랑크스를 분절하고, 소규모 전술 부대로 분할하여 유연성을 높이는 개혁을 단행했다.[46] 또한, 통일된 지휘 체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아프리카 주둔 로마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군은 점차 전문적인 군대로 발전했다.
독일 제국의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한니발의 이중 포위 기동에서 영감을 받아 슐리펜 계획을 고안했다. 슐리펜은 "칸나이 모델"이 20세기 내내 기동전에서 계속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51] 1991년 걸프 전쟁의 다국적군 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주니어 장군은 칸나이에서의 한니발의 승리를 다국적군 작전의 영감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칸나이 전투와 유사한 전술로 독일 제6군을 포위 섬멸하기도 했다.
7. 현대적 관점과 교훈
칸나이 전투는 민주주의 국가가 외부 위협에 직면했을 때, 내부 분열과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고 단결하여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로마의 전쟁 의지를 꺾는 데는 실패했고, 결국 16년간의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1]
7. 1. 한국의 관점
칸나이 전투는 한국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한국은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한의 지속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로마의 전쟁 의지를 꺾는 데는 실패했고, 결국 16년간의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1]이러한 칸나이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국은 굳건한 국방력을 유지하고 국민적 단결을 통해 어떠한 외부 위협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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